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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8

이대리

by 크롱준 2021. 5. 28.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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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금야금 모아서 뭐가 가능한 건 애초에 끝났어.

좀 더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니까?"

"이 새끼 또 시작이네. 고기나 먹어 새끼야."

이대리는 J가 장황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 말을 끊었다.

M이 듣고싶어하지 않아하는 눈치일 뿐더러, 이대리는 괜히 이러쿵저러쿵 논쟁을 하다

분위기가 애매해지는 것을 원하는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다툼을 해결하지도 않지만 맞딱뜨리지도 않는 이대리의 성격은 편리했지만,

가끔은 너무 좋게좋게만 가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가 헷갈리기도 했다.

그냥 모두가 좋은 소리만 하는 비즈니스 관계처럼.

"에휴 그래. 술이나 마시자. "

꼴꼴꼴꼴꼴.

소주잔이 기다렸다는듯이 소주를 채우는 이 소리를, 이대리는 사랑했다.

이대리는 술자리를 좋아했다.정확히 말하자면 편한 사람들과 있는 술자리를 좋아했다.

대학 시절 무엇도 모르고 매일 술을 마시던 시절, 이대리는 자신이 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고,그 착각이 깨졌던 것은 입사 직후 첫 회식자리에서였다. 대학에서 친구들과 마시던 술과 달리 회사에서 회사사람들과, 클라이언트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왜 그렇게 술은 쓴지. 한잔을 마시고 김부장의 유머에 웃고. 한잔을 마시고 박차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끄덕거리고. 한잔을 마시고 김부장의 앞에 있는 깍두기가 반쯤 없어진 것을 보고 이모에게 리필을 부탁하고. 마시는 한잔, 한잔이 타자가 타석에서 휘두르는 스윙처럼 느껴졌고, 이대리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술자리에 깊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소주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알콜향이 짙었는데, 분명 같은 회사에서 만든 소주인데 그렇게 맛이 다를 수 있음에 신기해하며 박차장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르곤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술 강권하면 큰일난다며, 상사들은 이대리에게 절대 억지로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지금 네가 문제를 일으키면 내가 귀찮아지니), 괜히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대리 성격상 한잔, 두잔 가리지 않고 받다 보면 어느새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을 때 어김없이 벽에 손을 탁! 짚고서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대리는 그 때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내가 술을 좋아하는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안 즐거우면서도 취할수가 있구나. '

'집에 가고 싶다.'

그날 이대리의 팀은 새벽 3시에 노래방에서 나와 흩어졌는데,

다음날 8시 반에 모두가 자리에 깔끔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

이대리는 회사생활이 녹록치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

 

치이익.

곱창과 막창, 대창과 떡은 짜릿한 소리를 내며 익어갔는데,

곱창모듬 하나가 없어지는동안 이대리와 친구들은 소주 4병을 비웠다.

이유는 도통 모르겠지만, 이런 자리의 술은 그렇게 달았다.

소주잔에 사카린을 발라놓은 것 아닌가 싶었다.

"이모 여기 곱창 2인분 좀 더 주세요!.

야 그런데 얘는 왜 안오냐. 우리 다 먹었는데. "

"회사가 좀 늦게 끝났다고 했어. 지금 거의 다 왔대. "

아직 오지 않은 K는 잠실에서 일했는데, 퇴근길 올림픽대로가 많이 막히는 모양이었다.

"야 근데 진짜 너희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투자 꼭 해라. 안하면 이 나라는 답이 없다."

얼굴이 빨개진 J는 처음에 하려던 말을 끝내야 직성이 풀릴듯 싶었다.

"요즘 조금이라도 살만한 아파트는 다 10억씩 하는거 알잖아. 그런데 10억이 말이 10억이지, 그거 월급으로 모을수나 있냐? 매월 300씩 모아도 10년에 3억 6천 모은다 3억 6천. 그런데 그거 알아? 첫번째로, 한달에 300을 모을 수가 없고, 둘째로, 10년 후에는 아파트가 10억보다 더 할 거라는거지. 덮어놓고 모으다보면 진짜 답도 없어. 벼락거지 되는거야 벼락거지. "

이대리는 자신도 모르지 않는, 사실 절실히 느끼고 있는 J의 이야기가 듣기 싫었지만

J가 말을 다 해야 멈출 것 같았고, 따지고 보면 틀린말도 아니기에 일단 내버려두었다.

"게다가 요즘은 대출도 안 나오잖아. 부모님한테 한 4,5억 받는거 아니면 서울에 집을 사는 것 자체가 안된다니까? 그리고 어짜피 우리는 청약 넣어도 안 돼. 애 셋 이상 낳지 않으면 웬만한 곳 되지도 않더라.

그런데 집을 안 사면 살기가 너무 퍽퍽하잖아. 나 저번 주말에, 전세집 주인한테 집에 못 좀 박아도 되냐고 전화로 허락받았잖아. "

그 때 새로 시킨 곱창이 나왔고,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건배를 했다.

"크으.... 맛있네. 그런데 아직까지 서울에서 부동산 말고 더 안정적으로 돈 벌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직장 선배 저기 잠실에 분양받은 아파트가 8억이 올랐잖아. 8억. 평생 일해도 8억 벌수나 있나? 진짜 무조건 투자해서 빨리 부동산 사야돼."

J는 말을 하며 상추 위에 대창과 마늘을 올리고, 부추를 덮어주었다.

서울에 자기 집이 없으니, 대창에게라도 멋진 집을 지어준 모양이었다.

그때, 듣고 있던 M이 대답했다.

"네 말이 맞지. 그래서 나도 월급 받으면 ETF랑 우량주에 좀 더 넣으려고. "

"ETF랑 우량주 가지고는 안 돼. 그거 끽해봤자 1년에 5프로 나오면 잘 나오는거잖아. "

"뭐 그렇긴 하지."

"1년에 5프로씩 모으면 10년후에 얼마인지 아냐?아니지. 넉넉~잡아서 10년동안 10%씩 수익 낸다고 해보자. 그럼 대충 얼마냐면.. "

J는 약간 취했는지, 스마트폰에서 계산기 어플을 바로 찾지 못했지만,

어플을 찾자마자 순식간에 계산을 뚝딱 해냈다. 재무팀에 있는 놈 다웠다.

 

"자 봐봐. 10%씩 수익내도 월 300씩 넣었을 때 10년 동안 6억정도밖에 안돼. 10%를 내는게 어려운 건 차치하고 나서라도 말이야.

이런거 보면 우리 세대는 진짜 무조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으로 갈 수 밖에 없다니까? 20년 후 보고 투자하라는 건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들 세대에서나 먹히건 거였고, 요즘은 그때처럼 경제가 발전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씨발, 당장 살 곳이 없잖아? 집 못사고 전세 사는 동안 집 산 새끼들은 가만히 앉아서 4억이고 8억이고 척척 벌고. 우리 그 담임이 말하던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 인가 말했던 것 기억나냐? 요즘엔 B가 Buy인거 아냐? House-Buy 와 Death 사이의 C다 이말이야~ "

J는 술이 들어가서인지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너무 본인 의견만 강요하는 J의 말이 이대리는 듣기 싫었지만 (특히, '무조건' 이라는 말을 지나치게 자주 쓰는 것이 거슬렸다.) 그걸 지적하는 것 또한 이대리의 성격과 맞지 않으므로 그냥 맞장구나 치며 술이나 마시는 데에 집중했다.

이대리는 J의 계산이 너무 단순하며,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닌가 싶었지만 어디가 이상하냐고 물어보면 딱히 답할 것이 없는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 M은 계란찜을 푹. 찍으며 말했다.

"그러다 잃으면 어떡해. 요즘 주식이고 코인이고 업다운이 장난 아니던데.

M이 잔을 들어 셋은 건배를 했고, M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주식이고 코인이고 변동성 큰 곳에 투자한 다음에 허구한 날 그것만 쳐다보고있는 거 못하겠더라. 정작 일상생활이 안 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애초에 그런 거 잘 알아보고 좋은 곳에 투자할 깜냥이 안되기도 하고. 그냥 나는 월급 받아서 적금 조금, 지수 ETF에 조금 넣는게 내 스타일에 더 맞는 것 같아. 괜히 위험 높은 곳에 투자했다가 돈 잃을 확률까지 계산해보면 내 방법이 나을수도 있어. 무엇보다 나는 내가 번 돈이 투자 잘못해서 없어지면 너무 짜증날 것 같아."

"네 말도 맞지. 그런데 그러면 서울에 집은 어떻게 사려고? 아까 말한것처럼 상황이 답이 없는데?"

" 조금 안 좋은 아파트에서 시작하거나, 정 안되면 경기도건 지방이건 가면 되지. 서울 아닌 곳은 아직 살 수는 있는 수준이더라. 안 그래도 이번에 회사에서 충청도 인사발령 지원 받고 있는데 그거 고민중이야. 지금 여자친구랑 결혼도 곧 할거니까.. 그냥 같이 지방 내려가서 살까 하고. 너무 서울에서 돈돈돈하면서 살 필요 없을 것 같아. "

"야. 우리팀 부장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있거든? 부장님 대리 말년차쯤에, 어떤 입사동기 한명이랑 모은 돈이 거의 똑같았대.

그 때 우리 부장님은 대출 풀로 땡겨서 서울에 집을 샀고, 동기는 빚지기도 싫고 더 넓은 아파트 살고 싶어서 경기도에 집을 샀는데, 지금 둘이 자산 차이가 얼마 나는지 아냐? 부장님은 그 이후로 10억이 올랐고 부장님 동기는 2억인가 올랐는데 잘 팔리지도 않는다더라. 8억 차이야 8억. 잘못된 선택 하면 그냥 ㅈ되는거라니까?"

"어짜피 집이야 평생 살건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집값이 오르던 말던 상관 없는거 아냐? 가격이 오른 집을 팔고 나서 더 안 좋은 집으로 가는게 아니면 말이야. 오히려 그렇게 서울에서 악착같이 사는 동안 좁은 집에 사느라, 빚 갚느라 더 불행할 거 같은데? "

"아니 8억이라니까? 그럼 나중에 자식한테 4~5억 물려줄 수 있는거야! 나머진 내가 쓰고. "

"다 늙어서 그런게 무슨 의미냐. 지금 행복해야지. 그리고 자식은 그냥 잘 키우기만 하면 됐지, 나는 무리해서 뭘 더 주고싶지 않다.

나도 실제로 부모님한테 딱히 받은것도 없고. "

"와나.. 얘 말이 안 통하네. 야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J가 갑자기 이대리에게 질문하자 이대리는 당황했는데,

이대리는 양파절임을 뒤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술자리에서 취한 사람들이 으레 이런 토론을 할 때 나오는 이대리의 습관이었다.

정치,종교,남녀갈등,경제.. 한국사람들은 술만 들어가면 다들 유시민이고 진중권이 되어서 열띤 논쟁을 하곤 했고, 갈등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주관 자체가 그렇게 뚜렷하지 못한 이대리는 그때마다 반찬을 뒤적거리곤 했던 것이다.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경청하기에는 피곤했기 때문에 반찬은 그 사이에서 찾은 중간지점 정도의 타협점이었다.

뒤적거리던 양파를 얼떨결에 집은 이대리는 별 생각이 없었다. 사실 J와 M이 하는 말 모두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대리는 삶에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살기보다는, 되는대로 살아가며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이었다. J의 삶이 주제가 뚜렷한 액션영화, M의 삶이 가족영화라면, 이대리의 삶은 매일매일이 같은 세트장에서 반복되는 시트콤이었다. 별다른 주제의식 없이 매 화마다 최선의 에피소드를 뽑아내기만 하면 됐다.

이대리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시트콤처럼 행복하게 넘길 수 있을지 생각했다.

"니네 둘 다 맞지 새끼들아~ 같은 새끼들끼리 싸우고 지랄이냐 지랄은~ 꼭 없는 새끼들끼리 싸워요.

술이나 먹자 술이나. 술 먹으면 다 해결된다.

아 그리고, 배부르니까 밥 한 개만 볶을까?"

"노놉. 그래도 두 개 볶아야지. 부족하게 시키느니 남긴다는 마인드로. "

"이모! 여기 밥 두개만 볶아주세요!"

이대리와 친구들은 볶음밥에 소주 3병을 더 마셨고, 이대리는 친구들과 집 이야기를 좀 더 한 것 같았지만 8병째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곱창집을 나와서.. 바로 앞에 있는 이자카야를 갔다가.. 타코와사비를 시키고.. 젓가락으로 낙지를 집을수가 없어서 손으로 집어먹었던 기억이 드문드문 났다. M은 항상 그랬듯 술자리에서 잠들었고, J는 노래방을 가자고 하고, 나는 타코와사비에 왜 타코가 없냐고 화내고, 이자카야에서 나온 소주가 시원하지 않아서 넷이서 쌍욕을 했었지.... 맞다. 곱창집에서 나갈때 쯤 K도 왔었지.

짹짹.

청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새소리와 함께 아침햇살이 창문을 반짝였다.

따스한 봄 햇살이 얼굴을 비추면서 일어나는 아침, 날씨는 화창했고 이불은 포근했으며 몸은 개운했다.

하지만 지난 수 년간 이대리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일어났을 때 개운하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라는 사실이었다.

이대리는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스마트폰을 확인했는데, 스마트폰은 충전도 안 되어 있어 배터리가 15%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AM 9:00'

출근시간은 8시 반까지였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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