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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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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롱준 2021. 5. 28.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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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이대리가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15분이었다.

1시간 45분 지각.

김부장은 이대리를 힐끗 보더니, 신경 쓰지 않는 듯 대답했다.

"이프로 술 마셨어? 아예 반차 쓰지 그랬어~ 상관없는데.

별일 있어서 안 나오나 했다 야.

다음부턴 늦지 마~"

시대가 변하고 상사가 조금 욕만 해도 사내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오는 시대. 몸을 사리는 김부장은 이대리에게 별말을 하진 않았지만 살짝 튀어나온 관자놀이의 힘줄은 김부장의 언짢음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매일 7시 50분까지 출근하는 김부장이, 지각한 이대리를 얼마나 탐탁지 않게 생각할지 이대리는 잘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회사가 장난이야?' 같은, 그 옛날 폴더폰처럼 낡은 말이라도 들었으면 했다.

철퍽철퍽.

거의 몸에 물만 묻히다시피 한 이대리는, 귓속에 물이 남아있는 것을 느끼며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쑤셨다. 물론 몰래.

지각할 만큼 많이 마신 술에 비해서 지갑이고, 스마트폰이고 놓고 온 것도 없고, 집에 들어와서 샤워까지 하고 잔 것을 떠올린 이대리는 스스로가 기특했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소주를 이겨내고 침대에 오른 것을 보면 15년간의 음주 경력이 아예 헛된 시간은 아니었나 보다. 늦게 시작한 오전은 금세 가서 (실제 시간이 짧았으니까) 어느새 이대리네 팀은 점심 먹으러 갈 준비를 했고, 김부장은 한 손에 자켓을 든 채로 일어나며 아마 그가 회사 생활 중 가장 많이 했을 질문을 했다.

"오늘 점심은 뭐 먹지?"

"이대리 어제 술 마셨는데, 콩나물국밥집 어떠세요?"

"흠.. 그럴까? "

아아. 이대리는 자신을 배려해 주는 조과장이 오늘만은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그냥 아무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지 모르면 좋을 텐데.

이대리는 오후가 되어서야 주식창을 봤다. 오늘 같은 날에 주식까지 보고 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김부장이 성과평가에 무슨 말을 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킨 주식창에는 본 적 없었던 숫자가 적혀있었다.

'12,240원 / 전일대비 : 22.4% 상승'

이대리가 사 놓았던 바이오 주식이 22.4%나 올라있었던 것인데, 바이오 주식은 물론 이대리가 주식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 보는 상승폭이었다. 이대리는 심장이 뛰었다. 8개월간 물려 있던 가격에서도 12%나 오른 수준이었다. 아아, 이날을 위해서 지금까지 그 시퍼런 하락장에서 얼마나 많은 물을 탔던가. 처음에 바닥인 줄 알고 들어간 이 주식은 들어가자마자 대표가 '어서 와! 우리 집 지하실이 근사한데 한번 구경할래?'라고 권유하는 바람에 지하로 들어갔다가, '지하실 밑에 벙커도 있어!'라는 말에 보고 싶지 않은 벙커도 구경시켜주는 얄궂은 주식이었다. 그때마다 이대리는 조막손 같은 월급으로 꾸준히 물을 타곤 했고, 좁고 음침한 벙커에 쪼그려 앉아 이대리는 결심했다.

'이거 진짜 본전만 오면 바로 다 판다. ㅅㅂ.'

하지만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막상 본전을 뚫고 수익을 내니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거 이제 시작인가? 지금 나오면 바보인가? '

'아니야 지금 슈팅 주고 바로 내일부터 뺄 수도 있어.'

'아.. 어디에 뭐 승인 신청해서 오른 거구나.. 승인이 난 것도 아니네?'

'아 본전 보면 바로 판다고 진짜 다짐했는데..'

이대리는 종목 토론방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올리고 있었다.

'주주 여러분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지금까지 버틴 분들이, 지금 나온 상승 먹을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이번에 승인 신청한 CH-A67I 은 한국은 물론 Erectile dysfunction 시장에서 독보적인 신약이며, 이거 최종 허가만 나면 시총 100조도 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평선 골든크로스 나왔고 저항선도 가볍게 뚫었으니 20일선 타고 쭉 가서, 저는 연말까지 주가 12만 원 봅니다. 홀딩!!'

이대리는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글을 보고 주가를 확인했다.

'12,380원 / 전일대비 : 23.8% 상승'

5분 전보다 1.4%나 올라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대리는 다른 글을 눌렀다.

'으이구 병신들 ㅋㅋ 또 행복 회로 돌리고 있네.

이번 거 아직 아무 결과도 안 나왔는데 대표가 언플 해서 주가 올리려는 거 모르겠냐?

대표 이러는 거 한두 번 보나.. 진짜 발전이 없는 새끼들이네.

지금 차트 구성 보니까 갭상 띄운 다음에 갭 메꾸러 가고, 앞으로 지루하게 떨어질 거다.

이 회사 적정주가는 딱 5천원대임 ㅋㅋ 나는 5천원에 자동매수 걸어놓고 다른 주식 사러 가야겠다.

1년 후에 내 말이 맞는지 아닌지 한번 확인해봐라~ 바보들 수고하고~ '

차트에 대해서 하는 말은 잘 못 알아들었지만, 이대리는 다시 주가를 확인했다.

'12,180원 / 전일대비 : 21.8% 상승'

글을 읽기 전보다 순식간에 2%가 떨어졌고, 이대리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 순간에도 호가 창의 가격은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12,150 원'

'12,140 원'

'12,180 원'

'12,200 원'

'12,250 원'

'12,280 원'

'12,450 원'

'12,350 원'

'12,100 원'

'12,220 원'

이대리는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하루 일당이 왔다 갔다 했기 때문이다.

그때, 임과장이 이대리를 불렀다.

"이대리."

'12,140원'

"이대리?"

'12,100원'

"야 이대리?"

"아 넵 과장님! 죄송합니다. 깜빡 못 들었네요. "

"아직도 술이 덜 깼나.. 잠깐만 이리 와봐."

임과장은 다음 달부터 진행될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설명했고, 거래선 미팅 날짜를 조율하는 일에 대해서 이대리에게 일을 맡겼다.

이대리는 집중이 잘되지 않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기에 임과장의 설명을 듣고 함께 일정에 대해 한참 논의했다. 직원 각자가 컨택하는 거래처 관계가 고려되어야 하기에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리로 돌아온 이대리는 바로 주식창을 확인했다.

'11,580원 / 전일대비 : 15.8% 상승'

'뭐라고?'

이대리는 눈을 의심하며 다시 주식창을 껌뻑껌뻑 쳐다보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잘못된 건 아닌데, 임과장한테 다녀오기 전보다 주가가 8%나 빠졌다는 게 이대리는 믿기지 않았다. 이대리의 입술에 침이 마르기 시작했다.

'아 미친.. 아까 팔았을 걸 그랬나..'

'잠깐 담력 테스트하는 거 아닐까? 남자 인증 구간인가?'

'이렇게 쭉 내려가서 다시 지하실 가는 거 아니야?'

'아까 글에 12만 원 간댔는데?'

'매도버튼 눌러? '

"이프로. 잠깐만 이리 와볼래?"

이대리를 부르는 김부장의 목소리였다. 유난히 바쁜 오늘, 김부장의 심기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아 네네. 가겠습니다! 잠시만요! "

'팔까?'

'말까?'

'12만원?'

'5천원?'

'존버?'

'대박?'

'쪽박?'

엉덩이를 뗀 채로 모니터를 쳐다보면 이대리는 이내 클릭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김부장에게 갔다.

'고객님의 [매도] 주문이 [11,540원]에 [전량] 체결되었습니다. '

철커덕철커덕.

평소보다 늦게 끝나는 바람에, 이대리의 퇴근길 지하철은 영락없는 지옥철이었다. 하지만 오늘만은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는데, 8개월만에 내 품으로 들어온 수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긴긴 결혼생활 도중 늦둥이를 낳으면 이런 느낌일까. '실현 손익'에 찍힌 빨간색 글씨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대리가 판 주식은, 이대리가 팔 때보다 3% 정도 더 떨어져 장을 마감했다. 이대리는 스스로의 상황 판단력과 결단력에 박수를 보냈다. 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을 예정이었다.

"... 이번 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연세사랑병원, 관절염 센터로 가실 분은, 사당역 14번 출구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

이대리는 약간의 자신감이 차올랐다. 어떻게 주식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시드를 불리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바로 앞에 끼인 남자의 스마트폰 화면이 이대리의 눈에 들어왔다. 코인 거래소 앱이었다.

'조과장님이 말했던... 키티코인... '

그 때 문득, 어제 이자카야에서 J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전날 술자리의 기억은 이렇게 깜짝 선물처럼 찾아온다.

"야, 주위에 코인으로 15억 번 형님이 계시거든? 그 형님이 차트 보는 거 하나로 거래를 기막히게 하는데,

그 형님이 추천해 준 코인이 있어. 그래서 지금 나도 들어갔다. 이거 봐봐."

이대리는 술에 취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화면을 쳐다봤고, J가 보여준 앱에는 키티코인 차트가 떠 있었다.

J에게 나도 이 코인 안다고. 회사 선배가 나만 알고 있으라며 추천받았다고. 말을 하려다 만 것 같긴 한데

실제로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키티코인....'

신림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고, 그 사이에 낀 이대리 머릿속에는 전날 밤 J가 했던 말이 돌아다녔다.

"자 봐봐. 10%씩 수익 내도 월 300씩 넣었을 때 10년 동안 6억 정도밖에 안돼. 10%를 내는 게 어려운 건 차치하고 나서라도 말이야.

이런 거 보면 우리 세대는 진짜 무조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으로 갈 수밖에 없다니까? 20년 후 보고 투자하라는 건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들 세대에서나 먹히건 거였고, 요즘은 그때처럼 경제가 발전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씨발, 당장 살 곳이 없잖아? 집 못 사고 전세 사는 동안 집 산 새끼들은 가만히 앉아서 4억이고 8억이고 척척 벌고. "

봄과 여름 사이에 있는 계절, 7시의 하늘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애매한 색깔이었다. 이대리는 하늘을 보며, 지금 이 색깔이 '낮'과 '밤'사이의 '저녁' 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이대리는, 그날 저녁에 신림역 앞 버거킹에서 키티코인을 100만 원어치 매수했다.

'정찰병이라고 생각하자..'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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