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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11

크롱준 2021. 5. 28. 18:22

 

 

 

 

 

 

"이번 주말, 오랜만에 나들이 계획 세우셔도 좋겠습니다. 오늘 서울의 기온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주말 날씨를 들으며 이대리는 출근을 준비했다.

이대리의 팀은 요즘 한창 바쁜 시즌이었는데, 한창 바쁠때면 퇴근이고 주말이고 없는 날들이 계속됐다. 사기업 들어가면 야근이 많다고 익히 들어왔던 바였지만, 들어본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였다. 금요일 새벽 3시에 퇴근하고 토요일 아침 10시에 다시 출근을 준비하는 삶. 퇴근 후에 운동하러 가는 임과장의 '살려고 하는거야...'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돈이고 뭐고 됐으니까 잠이나 좀 더 잤으면 좋겠다...'

 

 

 

화창한 해가 뜬 주말에, 이대리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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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것까지만 이대리가 해주면 되겠다. 주말까지 나와서 고생이 많아."

 

 

 

"넵 감사합니다. 저보다 과장님이 더 고생 많으시죠. 집에 아이도 있으신데.."

 

 

"이대리.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 말이야. 주말에 일하는게 좋아."

 

 

"네?"

 

 

"주말에 일하는게 좋다고. 여기가 집보다 덜 힘들다고. 나 지금 너무 편해."

 

 

 

"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행복하시죠 과장님?"

 

 

"ㅋㅋㅋㅋㅋㅋㅋㅋ당연하지. 이대리도 지금 여자친구랑 얼른 결혼해~"

 

 

"ㅋㅋㅋㅋㅋㅋ 아 넵 ㅋㅋㅋ"

 

 

"ㅋㅋㅋ 아 맞다 이대리. 그런데 오늘 좀 일찍 들어가봐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맞아요. 사실 이제 슬슬 가봐야 해서, 나머지는 혹시 일요일 저녁까지 해도 될까요?"

 

 

 

"어어 그래 당연하지. 그렇게 급한거 아니니까 천천히 해줘. 그런데 어디가? 데이트?"

 

 

 

"아 아니요. 오늘 부모님 댁에 내려갑니다. 아버지 생신이셔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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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입니다"

 

 

 

피곤했던 이대리는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겨우 서울역 환승센터에 내렸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이대리는 유독 서울역에 왜 이렇게 노숙자가 많은건지 궁금했다. 기차역에서 무료급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들이 많이 지나다녀서 수익성(?)이 좋은 것도 아닐텐데 왜 기차역에만 노숙자가 많은걸까?

 

 

 

'기차가 돌아다녀서 주변이 따듯해서 그런가? '

 

 

 

이대리는 자기가 생각했지만 정말 멍청한 생각이라고 되뇌이며 KTX를 타려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서울역 방향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도중, 이대리의 눈에 길 모퉁이에 앉아있는 노숙자 한명이 들어왔다. 따듯한 봄날씨인데도 빨간색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있었으며, 그 안에는 폴로 카라티를 받쳐 입고 츄리닝 바지에 신발은 나이키 에어포스를 신고 있었다. 잘 보다보니 입고 있는 옷들이 이대리 것 보다 좋은 것 같기도 한 생각에 이대리는 흠칫했다.

 

새벽퇴근에, 주말 출근에, 부장한테 무언의 욕을, 서운한 여자친구한테 눈칫밥을 먹고, 클라이언트 술 상대 해주다가 토요일 저녁까지 해야하는 일이 생각났지만, 그렇게 번 월급으로는 집도 못 살때, 이대리는 노숙자나 자기나, 집 없이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사는 건 똑같은데 저렇게 맘 편하게 사는게 더 낫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졸리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분들 나라에서 돈도 나와서 생각보다 할 거 다 하고 산다던데.....'

 

 

 

물론 이내 반성하게 되는 멍청한 생각이었고,

소주를 탁 내려놓으면서 한껏 찡그리고, 오징어를 집어먹는 노숙자를 보며 이대리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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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를 타면 부모님 댁까진 금방이었다.

하지만 가깝다는 말이 자주 갈 수 있다는 말과 똑같은 건 아니었기에, 이대리는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만 집을 가곤 했다.

 

 

'부모님 건강하실 때 자주 찾아뵈어야 한다던데.....'

 

 

하지만 부모님은 출근을 안해도 이대리를 해고하지 않았고 데이트를 안 했다고 이대리와 이별하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후순위로 밀리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리는 약간의 씁쓸함을 느꼈다.

 

 

 

 

"엄마~ 나 왔어~"

 

 

나이를 먹어도 이 말을 할때면 학교에서 돌아온 중학생이 된 느낌이, 이대리는 좋았다.

하지만 원래 같으면 서울에서 돌아온 아들을 (격하게) 환영해줘야 할 집이, 오늘만은 분위기가 약간 이상했다.

 

 

 

 

"어 아들. 왔어? 오느라 고생 많았다."

 

 

 

 

부엌에 있는 이대리의 어머니는 짧은 인사만 건네고 칼질에 집중했으며, 소파에 앉은 아버지는 티비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여자가 알고보니 30년 전에 헤어진 내 동생이라는 식의 주말 연속극이었는데, 원래 아버지는 저런 연속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조용히 눈치를 살직던 이대리는 바로 직감했다.

 

 

 

 

 

'이 양반들 싸웠구나.'

 

 

 

 

 

이렇게 오래 같이 살았으면 찰떡같이 잘 맞을법도 한데, 40년 가까이 되도록 싸울 주제가 남아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대리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싸울거리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창조력에 존경을 표하여, 아버지 옆에 가서 앉았다.

 

 

 

 

 

"아빠 나 왔어~ 생일 축하해~"

 

 

 

 

"어 그래 고맙다. 역시 아들밖에 없네. 일도 바쁠텐데 뭐하러 왔어. 오는데 차는 안 막혔어?"

 

 

 

 

"KTX 타고 왔는데?"

 

 

 

 

"아 맞아. 그랬었지~"

 

 

 

 

 

이대리의 아버지는 평소답지 않게 힘이 없어 보였다.

그 때 어머니의 칼질소리가 멈췄고, 어머니는 집에 와서 가장 듣기 좋아하는 소리를 해 줬다.

 

 

 

 

 

"아들, 밥 먹어라."

 

 

 

 

 

"오예~"

 

 

 

 

 

기분 좋게 식탁에 앉은 이대리와 다르게, 아버지는 느릿느릿 일어나 식탁으로 다가왔다. 이대리의 어머니는 그 모습을 노려보더니 속에서 열불이 나서 못 참겠다는듯이,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던 겉옷을 챙겨서 입기 시작했다.

 

 

 

 

 

"엄마 어디가? 밥 안먹어?"

 

 

 

 

 

"나는 아까 먹었어. 그리고 잠깐 이 앞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와야돼.

너 급하게 내려오느라 배고플텐데 어서 먹어."

 

 

 

 

 

"아 그래? 그래도 웬만하면 같이 먹지.."

 

 

 

 

"아냐. 너 좋아하는 갈비찜 했으니까 아빠랑 맛있게 먹어. "

 

 

 

 

그리고 어머니는 문 밖을 나섰다. 물론 가기 전에 아버지를 한번 더 흘겨보는 것을 잊지 않고.

이대리는 불안함을 느꼈다. 이 양반들 이번엔 정말 대판 싸웠구나.

 

 

 

 

 

 

"아빠. 엄마 왜 그래? 둘이 싸웠어?"

 

 

 

 

 

"아니.."

 

 

 

 

 

힘 없이 대답하며 아버지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엄마 갈비찜에 소주가 술술 들어가긴 하지.

 

만든 사람은 화가 나 나가버린 부엌에서, 남자 둘은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대리는 둘이 신경쓰여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뻔 했지만, 갈비를 입에 넣는 순간 이건 정확히 목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콧구멍이었다면 이렇게 완벽한 맛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본능에 이성을 지배당하며 행복하게 갈비찜을 씹던 이대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에게 물어봤다.

 

 

 

 

 

"아니 아빠 말 좀 해봐. 진짜 무슨일이야? 이번엔 진짜 대판 싸웠네?"

 

 

 

 

"흠..."

 

 

 

 

이대리의 아버지는 말 없이 소주를 따라 마셨다.

말을 해주지 않자 어쩔 도리가 없어진 이대리도 소주잔을 들었고, 이내 둘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갈비찜에 소주를 참기 어렵긴 했다.

 

 

 

 

 

"그래, 여자친구는 잘 만나고 있냐?"

 

 

 

 

"어 응~ 그렇지 뭐. 오래돼서 그런지 이제 되게 편해. 가족같아."

 

 

 

"그래? 그럼 데려와. 인사는 언제 시켜 줄꺼야?"

 

 

 

"에이~ 진짜 결혼하기 전이나 한번 인사시켜 줄께~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뭐. "

 

 

 

"걔랑 결혼생각은 있다고 그랬지? 그래.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면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이대리의 아버지는 말을 끝내자마자 소주잔을 비웠는데, 벌써 2병째였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에 이대리는 당황했다.

 

 

 

 

"어휴 이부장님 왜 이렇게 빨리 마셔~ 천천히 마셔. 어짜피 오늘 자고 갈건데."

 

 

 

 

 

"하하.. 부장은 무슨. 은퇴한지가 벌써 1년이다 임마.."

 

 

 

 

 

실제로 이대리의 아버지는 1년 전에 정년퇴임을 했다. 근 30년을 일한 직장을 그만 둔 기분이 어떨지 감이 잘 오지 않았지만, 무언가 애증했던 것을 잃어버리고 다신 찾지 못하는 기분이 아닐까.. 하고 이대리는 짐작하곤 했다. 짐작밖에 할 수 없었기에 공감할 수 없었고, 당분간만이라도 당신을 자주 찾아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바빠도 오늘 무리해서 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아들, 그렇게 좋으면 지금 결혼하지 왜 안해?"

 

 

 

 

 

"아니 그냥.. 이번에 집 전세계약도 새로 했고..."

 

 

 

 

 

짠.

 

 

 

 

 

"그리고 결혼하면 집 하나는 있어야 하잖아~ 못해도 서울에 전세는 얻어야 하는데, 요즘 서울 집값이 진짜 만만치가 않아~

백날 월급 모아봤자 엄청 낡은 집 하나 사기도 힘들다니까? "

 

 

 

 

 

"그렇지..? 뉴스에서 그렇다고들 하더라.."

 

 

 

 

 

짠.

 

 

 

 

 

꽤나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우고 난 뒤, 이대리의 아버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들, 그러면 말이야..."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