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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10

크롱준 2021. 5. 28. 18:21

'Las Vegas'

눈을 멀지 않게 하면서도 가장 밝은 빛을 낼 수 있는 기술. 딱 그 기술을 쓴 것 같은 간판이 반짝이고 있었다. 중간에 있는 'Las Vegas'라는 간판은 사막에 떠있는 해처럼 작열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파랑, 핑크, 빨간색의 네온사인들이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런 어지러움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질 만큼 라스베이거스의 분위기는 강렬했다. 초등학교 웅변대회에서 중간에 할 말을 까먹었을 때 이후로 이대리의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건 처음이었고, 후텁지근한 서부의 공기조차 달게 느껴지는 휴가가 이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대리는 생각했다.

"Sorry. Where is the Casino?"

하지만 이대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카지노를 물어봤고, 카지노 입장 줄을 서기 시작했다.

도박은 할 줄도 모르지만, 라스베이거스까지 와서 카지노를 안 들르고 가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가보는 곳이니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으로 휴가 마지막 날 일정을 카지노로 잡았고, 돈은 딱 100달러만 쓰고 갈 마음을 먹었다. 정말 재미로만 하고 기분 좋게 마지막 날 밤을 끝낼 예정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이윽고 카지노에 쭈뼛쭈뼛 들어간 이대리는 그나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게임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재미로 하는 거라지만 즐기다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드? 룰도 모르는데..'

'슬롯머신? 아 뭔가 허무할 것 같은데.. '

'룰렛? 오?'

룰렛은 언젠가 영화에서 돌리는 걸 본 것 같았고, 실력으로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이대리는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배팅을 어떻게 하는지 파악했고 이내 배팅을 하려고 딜러 앞에 우뚝 섰는데, 이대리의 표정에 짐짓 비장함이 돌았다.

기세는 전라도의 아귀였지만 판돈은 아귀찜 대짜 수준이었던 이대리. 이윽고 10만 원을 한 숫자에 배팅했다.

"16 !!"

그때, 옆에 있던 J가 갑자기 튀어나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으이구 병신아. 그거 해서 따도 뭐 얼마나 따겠냐? 확신이 있으면 시원하게 걸어야지!"

이 새낀 어디 있다가 나온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룰렛이 돌고 있어 이내 이대리는 룰렛에 정신을 집중했다.

'빙글'

'빙글'

'빙글'

'16'

"으잉?"

"오우 맨! 콩그레츄레이션!"

구슬이 술 취해 집에 돌아오는 이대리처럼 빙글빙글 대다 16번으로 들어오고,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게 그 안에 안착한 순간, 그 순간 딜러를 포함한 주변 모두가 환호성과 박수를 이대리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판타스틱!"

제이슨 스타뎀을 닮은 대머리 외국인, 곱슬머리 키 큰 흑인, 폴로 카라티를 입은 채 옆에서 포커를 치고 있던 배 나온 아저씨, 서빙을 하고 있던 웨이터, 저 반대편 카드를 섞고 있던 딜러, 키가 2미터는 돼 보이는 선글라스 낀 경비원,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누나, 그 누나가 데려온 흰색 푸들, 슬롯머신으로 칩 좀 딴 것 같은 동양인, 빨간 스프라이프 티를 입은 월리.. 모두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며 이대리를 축하했다. 인류가 최초로 달에 착륙했을 때, NASA의 직원들이 이렇게 환호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대리는 생각했다.

'아니 뭐지. 이거 이렇게 축하할 일인가.'

'이게 그렇게 나오기 힘든 확률인가?'

'1/52면 그럴 만은 하지.'

'아니 그래도 남이 돈 땄는데 이렇게 축하해 주는 게 신기하네'

'어쨌든 대박이다!'

그 옆에서 J는 손뼉을 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대리의 선택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아까 말했을 때 더 걸었으면 딴 돈이 얼마냐... 아쉽다 아쉬워."

 

그 말에 대꾸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환호성에 파묻혀 이대리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그때 이대리가 마주했던 딜러가 양손에 코인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이대리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언뜻 봐도 굉장한 양이었는데, 이내 딜러에게 바구니를 전달받은 이대리는 그 묵직함에 깜짝 놀랐지만, 이대리가 느껴본 것 중 가장 기분 좋은 묵직함이었다. 겨우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은 이대리는 코인을 확인했고,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환호성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코인 전체가 금색으로 뒤덮여 있고, 테두리는 손으로 새긴 듯한 빽빽한 빗살 무늬가 고급스러웠다. 코인은 가장자리로 갈수록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어딘가 익숙한 그림이어서 이대리는 자세히 들여다봤다. 수염에.... 얼굴이 동그랗고..... 곰인가....? 아닌데..... 곰은 수염이 없는데..... 아 고양이구나! 잘 보니까 리본도 있네! 아 이거 키티네 키티! 키티!

'키티?'

따르르르르릉.

천장 끝 모서리에 피다 만 곰팡이가 보인다.

'카지노에 곰팡이가 있네..'

'그것보다 카지노 벽지가 우리 집이랑 비슷하네..'

이대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취방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언제나처럼 피곤하고 찌뿌둥한 상태로 알람에 깨는 아침이었다.

지난밤 꿈이 너무 생생해서 밤새 깨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이대리는 정말정말정말 씻기 싫다고 생각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키티..코인..? '

이대리는 급하게 스마트폰을 찾아 코인 어플을 켰다. 로딩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미국 형들이 나 잘 동안 선물을 준비한 건가. 머스크 형이 뭐 또 한마디 했나. 조과장님이 말한 작업이 벌써 들어간 건가? 하긴 기습은 새벽이지!

'평가손익 : -1% '

이대리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다음 역은 교대, 교대역입니다. 나모나꾸, 교대, 교대 에끼데스"

오늘따라 재밌는 동영상이 뜨는 바람에, 유튜브를 보다 보니 이대리는 원화 채굴장에 거의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가는 출근길을 보자 하니 오늘 시작이 좋다고 생각한 이대리는, 습관적으로 다시 코인어플을 켰다.

'평가손익 : +0.5%'

'으..'

별생각 없이 어플을 닫으려는 찰나, 이대리는 키티코인의 차트가 약간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차트에 빨갛고 얇은 선이 위로 길게 그어져 있었는데, 잘 보니 5분 전에 +35%까지 급등했다가 순식간에 내려온 흔적이었다.

투명한 물에 잉크를 떨어뜨린 것처럼, 이대리의 동공이 커졌다.

'아니? 왜?'

'그것도 이렇게 짧게?'

'쌀보리 게임이야 뭐야?'

'35%?? '

비록 지금 이대리의 시드머니로는 +35만 원을 갔다가 내려온 것이지만, 이대리는 뭔가 모를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아. 내가 꾼 꿈이 예지몽이었구나.'

'나라는 얼간이는 줘도 못 먹는구나. 아아아아아.'

 

이윽고 이대리는 조과장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진짜 키티코인에 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세력이 아침에 한번 준비운동을 한 게 아닐까? 하고.

이제 몸도 풀었으니, 세력 형님들이 조만간 한번 제대로 쏘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인 판단이 섰다.

'그런데 지금처럼, 내가 안 보고 있을 때 순식간에 해먹고 튀면 어떡하지?'

저번에 임과장에게 다녀왔다가 주식이 순식간에 빠져있는 것처럼, 회사에 있다 보면 그때그때 대응을 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고민을 하던 이대리는 오래전 유튜브에서 본 내용이 기억났고, 코인 어플을 켜 예약 주문을 걸어놓기 시작했다.

' [평단가] 기준으로 [+40%] 에서 [키티코인]을 [전액] [시장가 매도] 합니다.'

' [평단가] 기준으로 [-30%] 에서 [키티코인]을 [전액] [시장가 매도] 합니다.'

일정 손실이나 이득을 볼 때 자동적으로 예약 주문을 걸어놓으면 기계적으로 대응도 되고, 일정 수준으로 손실을 제한하는 효과도 있다고 어느 영상에서 봤던 기억이 난 이대리는, 예약 주문을 체결한 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40% 올라가면 팔았다가 가격 조정 때 다시 사면 되고, 정말 폭락해도 어느 정도 감당 가능한 수준일 테니까. 이 정도면 자신을 영리한 투자자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출입문 열립니다. 출입문 열립니다."

언제나처럼 사람들 사이에 끼다시피 내린 이대리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하지만 왜인지, 자꾸 지난밤 꿈에 J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겨우 그거 걸면 따봤자 얼마 따겠냐?'

2번 출구로 나온 이대리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든 헬스장 전단지를 손에 쥔 채로 회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