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일류 대기업에 다니는 벼락거지 이대리 4
철커덕철커덕.
5시 50분에 나왔더니 평소보다는 지하철이 한산했다.
이대리는 오늘 스크린골프 때문에 일찍 퇴근한 김부장이 참 고마울 뿐이었다.
이렇게 운이 좋으니, 보러가는 전세집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이대리는 들떴다.
'직방에 올라온게... 1억4천 이었으니까... '
지금 이대리는 대학동의 전세 8천짜리 집에 살았다.
강남에 있는 초일류 대기업에 합격했다는 것이,
강남에 살 만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가까운 강남, 교대, 서초, 방배, 사당...
하나같이 무자본 초년생이 갈 집은 없었다.
회사에 가까울수록 원룸 전세값은 5천씩 뛰었고,
이대리는 고시생과 초년생과 대학생을 안아주는 고시촌의 품에 안겼다.
'1억 4천에서.. 1억 2천 전세대출 받고... 2천 신용대출받고..
대출금리가 대충 3프로니까.... 연 420만원.. 월 35만원...'
전액 대출인 게 부담스러웠지만 월 35만원은 매력적이었다.
이대리가 뭣도 모르고 살던 대학시절 반지하 원룸이 500에 45만원이었기 때문이다.
4년동안 모은 돈은 모두 주식에 가치투자 중이라 건드릴 수 없었다.
'월 35만원이면.. 그래도 오케이.. '
교통도 동네도 좋은 사당으로 올 생각에 이대리는 설레기 시작했다.
겨우 35만원에 2호선 4호선 환승도 할 수 있고, 중국야동소리도 안 들어도 되고.
이대리는 스스로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주식에서 잃은 게, 여기서 좋은 집을 얻으려는 신의 시련이었나보다.
"스크린도어 열립니다."
부동산 이름은 "짱 부동산" 이었다.
'요즘도 짱이란 말을 쓰나...'
문을 열고 들어간 이대리를 마주하는 건 파마가 약간 풀린 아주머니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늘 예약하신 분이시죠? "
"아 네 안녕하세요. 그 1억 4천... "
"예 맞아요 맞아요. 여기 앉으세요. 뭐 마실꺼 드릴까?"
"아 넵 그냥 물 주세요. 감사합니다. "
꾸루루루루룩.
정수기에서 물을 오랜만에 뽑았는지 공기방울 올라가는 소리가 크게 났다.
"오늘 보신 집이, 사당동에... 301호... 전세 1억 4천.. 관리비 10...
됐네요. 아, 그런데 여기 전세대출은 쪼금 힘든거 아시죠? "
"네? 뭐라구요? "
"이게이게 물건에는 문제가 없는데, 집주인분이 대출같은거를 싫어하셔서~
옛날 분이시거든~ 그래서 대출은 무조~건 안되신다네~?"
"아니 그래도 어플에는 분명 전세대출가능이라고 써있었는데요."
이대리는 잘못본건가 싶어 다시 어플을 켜서 확인했다.
분명 '전세자금대출가능' 옵션에 체크가 되어 있었다.
"아니아니 그게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럴리가 없는데~?"
"여기보세요.. 이렇게 되어있잖아요.."
"아니 우리 실장님이 올릴때 잘못올렸나보다~
죄송해서 어떡해요.. 이건 대출은 안돼요.. "
이대리가 콩팥을 팔지 않는 한 1억 4천은 없었다.
"하.. 오늘 직장 일도 미루고 여기 왔는데... "
"그럼 혹시.. 쪼오금 가격이 다르긴 한데.. 대출 나오는 매물 보시겠어요? "
"네..? 얼만데요..?"
"1억 6천인데, 여긴 대출이 아마 나올거에요. 한번 가보시겠어요?
위치는 원래 거기랑 비슷해요~"
'1억 6천... 3프로... 연 480만원.. 월세 40....'
그래도 허용 가능 범위 안이었다.
"넵 그럼 한번 볼께요...."
찾아간 집은 신축 빌라였고, 검은 도어락에 황금빛 테두리가 쳐져 있었다.
이대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과는 천지차이여서 이대리는 괜히 행동을 조심했다.
"예 사장님~ 여기 짱부동산인데요~ 지금 여기 손님이 와가지고.
그 사당동 A891번지 302호. 응응.
그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면 되는거죠? 알겠어요~"
삑. 삑. 삑. 삑.
문을 열고 들어간 원룸은 상당히 깔끔했다.
신축답게 새로 도배된 벽지와 장판. 화장실..
하지만 방 크기가 5평, 잘 봐줘도 6평이었다.
심지어 방이 길게 빠져서, 짧은 벽과 벽사이는 3미터가 될까말까였다.
이대리는 그 사이에서 앞구르기를 하는 상상을 했다.
한 바퀴를 다 못 돌것 같았다.
"깔~끔하죠? 이게 진짜 지은지 한달밖에 안됐어요.
지금 집주인이 전세가 필요해서 딱 이 호수만 전세 내놓은거에요.
다른 호수는 월세 1000에 60씩 받아요~ "
"아, 네.."
"혼자 사시죠? 직장인? "
"네."
"어휴 그럼 진짜 혼자 살기 딱 좋지~ 옵션도 다 있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딱 이런 원룸 사는게 좋아~ "
"아, 네..."
이대리는 수돗물도 틀어보고, 벽도 똑똑 두드려봤다.
유튜브에서 이렇게 해보라고 해서 따라해본 거였지만,
뭘 특별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근데 조금 좁네요.."
"좁아요~?! 뭐가 좁아~? 혼자 살기에는 딱 맞지 않아요?
혼자사는데 넓으면 오히려 관리하기 너무 힘들어~
여기 매트리스 놓고, 행거 걸면 혼자 충분히 살아요~"
이대리는 중개인은 몇 평짜리 집에 사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이렇게 좁으면 음식 냄새도 바로 나고.. "
"흠..."
중개인은 눈치를 살짝 보다가 말을 꺼냈다.
"그러면 혹시 온김에 다른 집도 보시겠어요?
가까우니까 온김에 보면 좋잖아요~"
"아 좀 더 넓은 집이 있나요?"
"네 여기서 걸어서 5분? 정도에 분리형 원룸이 있어요~
그런데 그건 쪼금 예산이 추가되는데.. 2천정도.. "
"네? 그럼 1억 8천이에요?"
"네. 그런데 정말 집은 좋아요.
보니까 고객님이 집을 볼줄 아셔서, 대충 고르시질 않네.
고객님이 보시면 정말 좋아하실거야. "
1억 8천은 생각도 안한 금액이라, 이대리는 당황했다.
1억 8천이면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대출을 당겨야 할 것 같았다.
'1억 8천.. 3프로... 540만원... 45만원...
어, 월세로 치면 얼마 안되네?'
연에 60만원이 더 나가지만, 월세로 치면 얼마 안되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네 그럼.. 한번.. 볼까요...? "
"어머 잘 생각하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중개인은 이대리에게 말을 건넸다.
"어휴 그런데 집이 조금 좁긴 하죠? 맞아맞아. 이렇게 덩치 큰 남자가 살기엔 조금 좁지~"
"네네 사장님. 거기 풍광빌라 401호좀 보려구요~
거기 지금 살고계신분 계시잖아. 그분한테 전화좀 드리고 바로 갈게요~"
새로 도착한 집은 이전 집보단 낡았지만, 여전히 신축 느낌이 났다.
당연히 지금 이대리의 집보다는 훨씬 좋았다.
똑똑똑.
"안녕하세요~ 짱부동산인데요~ 집 좀 보러왔어요~"
문을 열어준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퇴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집 좀 보겠습니다~"
집에선 담배냄새가 났지만, 방 자체는 깔끔했다.
심지어 그 방은 분.리.형 원룸이었다. 이대리는 싱크대가 침실과 분리된 방이 처음이었다.
이대리는 고기를 좋아했지만 가끔 집에서 고기라도 구울라치면
다음날 베개까지 고기냄새가 나곤 했고,
옆에있던 행거에 걸린 옷을 입고 나가면 회사사람들이 어제 고기 먹었냐고 물어보곤 했다.
그런 이대리에게 분리형 원룸은 쓰리베이 남향아파트나 다름 없었으므로,
2천만원에 이런 옵션은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다다다닥.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은 괜히 민망한지, 스마트폰만 계속 보고 있었다.
이대리도 여자 혼자 사는 집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였다.
마지막으로 이대리는 창문을 열어봤다.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 있는 옆 빌라 창문이, 이대리는 당황스러웠다.
각박해지는 현대사회에, 이웃끼리 얼굴이라도 보고 살라는 집주인의 의도인가 싶었다.
"어머 집 너무 좋죠? 분리형 원룸이라 크게 빠졌고,
준신축인데 이정도면 싼 거에요~"
"아 네.."
'그래도 채광은 중요한데... 근데 가격이 너무 좋기도 하고...
괜히 망설이다 나가면 어떡하지.. 아....'
철커덕철커덕.
"다음역은 신림, 신림 역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커진 지출에 이대리는 대출상품을 다시 살펴보는 중이었다.
이름있는 대기업이라 대출이 많이 나오는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계산기와 인터넷을 번갈아가면서 키던 도중, 중개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오늘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좋은 조건에 잘 하신거에요.
두번째 방은 제가봐도 너무 빌라끼리 붙어있더라구요~
그 방보다 채광도 잘되고 방도 더 큰데 1억 9천이면 시세에 비해서
계약 정말 잘 하셨습니다 ^^ 계약일에 뵙겠습니다 ^^ '
'1억 9천.. 3프로.. 570.. 월 48만원.. 관리비 7만원..'
이대리는 어플에 올라와 있던 1억 4천짜리 집이
여전히 '전세자금대출 가능' 이라고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다음편에 계속>